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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고물보따리

晩松 2012. 1. 22. 12:16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아빠가 다투셨다. 두 분 중에서 누가 먼저 화를 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빠가 ‘도’만큼의 높이로 말씀하자 엄마는 ‘레’만큼 소리를 높이셨고, 아빠가 다시 ‘미’ 높이로 말씀하셨다. 엄마는 당연히 ‘파’음의 높이로 대꾸하셨다. 그러다 큰 소리가 났는데 ‘도’부터가 화난 목소린지, ‘레’부터가 짜증난 목소린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활르 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먼저 거낸 사람은 아빠였다.


“모레, 상가 협의회에서 양로원 방문 행사가 있네.”


여기까지의 아빠 말씀은 내가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게 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 엄마가 대신 장사를 하셔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나도 아는 걸 모른다고 대답하셨다.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모르다니?”

“이제 겨우 자리 잡아 가는데 회사에 결근하란 말예요?”

“회사는 무슨 회사? 그만두랬잖아. 나 혼자 벌어도 굶기지 않을 테니 그만둬.”

“요즘 밥 굶기는 사람 봤어요?밥은 나 혼자서도 먹어요.”


나는 말없이 밥알만 세듯 먹고 있었다. 어른들은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걸 보면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마음이 얼마나 슬플 것인지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잘도 벌겠다. 괜한 사람들 찾아다니며 보험 들라고 하지말아. 망신이니까.”

“당신 하는 일만 최고지요? 당신네 식구들이 원래 그래요. 이익도 안 되는일에 자존심만 부리고 착하게 살아야지 하니까 형제가 모두 잘 사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그렇게 살지요.”


아빠는 급기야 상을 내리치듯 숟가락을 세게 놓았다. 아?네 식구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싫었을 것이다.


“우리처럼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 봤어, 당신?”

“모범인지 바본지 누가 알아요?”


아빠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탁 소리가 나게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목구멍까지 튀어 나온 불평 두더지들을 어거지로 두들겨 넣으며 나왔다.


“너까지 무슨 버릇이냐?”


엄마가 어느 때보다 크게 야단을 치셨다. 아빠에게 내뱉지 못하는 불만을 내게 쏟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빠에게 화살을 그만 쏘고 싶으니까 과녁을 나로 바꿔 소아대는 것이다.그걸 알므로 별로 섭하지 않았다. 어쩌면 작은엄마가 우는 예진이를 어쩌지 못해 괜한 나한테 구지람하던 걸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때문일 것이다. 예진이가 우는데 작은엄마는 나를 쳐다보며 야단을 치곤 했다.


“푸름이 너는 왜 얼굴을 미워지게 찡찡거리니? 왜 우는 거냐고? 우리 예진이는 안 울고 잘 노는데.”


이 말을 듣는 예진이는 하는 수 없이 울음을 그친다. 엉뚱하게 꾸중을 들은 나는 기분이 나쁘지만 예진이를 달래는데 한몫 했다는 기분으로 우쭐했던 일과 닮았을 뿐이다.

내게 화를 내는 엄마를 어쩌지 못한 아빠가 마당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먼 곳을 바라보며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이 집은 아빠 방이 따로 없으니 싸웠을 때, 더 불편하실 거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아빠를 비난하는 두더지가 꿈틀거렸다.


‘옥상에 사니까 담배 피우는 일 한 가지는 편리하시겠군. 다른 아빠들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고개만 창 밖으로 내밀고 피운다는데.’


아빠는 담배를 피우고, 엄마는 설거지하는 소리를 요란하게 냄으로써 화난마음을 풀고 있었다. 애들은 무엇으로 화를 푸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시면서 자기들 화만 푸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시던 아빠가 다시 들어오셨다. 아빠는 역시 나만큼 오랫동안 훔쳐보는 데에는 취미가 없는 모양이다. 방에 들어간 엄마와 아빠가 서로 헛기침하는 소리만 들렸다.

화내 봐야 내일 당장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먼저 말하기 싫어 그러실 거다.


‘아쉽다고 생각하면 풀지. 아이들보고는 먼저 사과하라고 하면서.’


모른체 하려다가 안방으로 갔다. 두 분 사이에 끼여들어 분위기를 바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학원 보내 주세요.”


제발 쉬게 해 달라고 졸라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지 몇 달째이니 스스로 가겠다고 하면 좋아하실 거라는 짐작으로 꺼낸 말이다.


“네가 어쩐 일이냐?”


가시가 돋은 엄마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앞 목욕탕 건물에 있는 하늘과 바다라는 학원인데 책도 맘대로 읽고 글짓기도 배우는 곳이에요.”


이 말에 대한 엄마와 아빠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빠는 반갑게 말씀하셨다.


“그런 학원이 있다니 다행이다. 잘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차분한 성격인 것 같은 네가 글과는 멀어서 걱정하던 참이다.”


엄마는 내가 아닌 아빠의 말씀에 시비를 거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관둬라. 피아노나 끝까지 하려면 모를까, 누구처럼 글 잘쓴다고 동네방네 소문났다간 제일 후진 사람 된다.”


아빠는 화가 다 풀렸는지 웃음을 섞어 가며 말씀하셨다.


“왜 변덕이 심하실까? 언제는 세 남자 중에서 글 잘쓰는 내가 제일 멋있다더니.”

“내가 변덕이 심한 게 아니라, 당신 글이 값어치 없어진거예요. 아니, 없어진 게 아니라.......”


이번에는 엄마도 한 발 물러나고 싶으셨는지 자신의 말투를 한탄으로 바꿨다.


“글 잘 쓰고 모범생이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줄 알았던 거죠. 백일장 마다 상 받고, 전교생 앞에서 낭독하면 왜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방학 숙제 전시회에 나온 병수 오빠 일기장에 행여 내 이야기라도 서지려나 싶어 앵두도 따다 주고, 별별 핑계대어 놀러 갔던 걸 생각하면....... 그런것들이 다 부질없는 고물 보다리 되는 걸 몰랐던 게지.”


추억에 잠기는 엄마에게 아빠는 다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 사는 게 어덯다고 그래? 예나 지금이나 사람답게 살고 있으니까 애써서 불행하다는 쪽으로 몰고 가질 말어.착하게 살면 복 받는 거야.”

“뭐가 복인지.......”

“어, 오늘 빌려 온 책 봐야지.”


나는 이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만하면 두 분다 화해되었다 싶었고, 하바 선생님이 빌려 주신 책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빌려주신 책 제목은 ‘불만을 보물로 바꾸는 33가지 방법’이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보물과 고물의 차이?’


나는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아빠의 낡은 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오래 된 일기장과 상장 그리고 편지 묶음들이 가득들어 있었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썼다는 것들이다. 하지만 보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곰팡이가 슬어 있어 들춰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 눈에도 고물 보따리라는 엄마 말에 가까워 보였다. 내용이야 뻔할 것이다. 모이기만 하면 '우리 어렸을 적엔.......'으로 시작하는 옛날 못 살던 시절의 이야기일 테니까. 듣는 것만으로도 지겨웠던 그 시절을 글로까지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넣어 두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난 아빠의 보물에 폭 빠지고 말았다. 곰팡이 냄새 나는 고물 보따리를 다시 열어 보게 된 것은 하바 선생님께 좋은 생활문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 날 하바 선생님은 생활문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는데, 맨 먼저 나눠 주신 것은 선생님께서 어렸을 때 쓰셨다는 일기였다. 그 일기를 읽고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들려 주듯 다시 써 보자고 하셨다. 생활문 시작하는 방법 몇 가지 중에서 때를 나타내면서 합동 작품으로 썼는데 아주 길고 자세하게 써졌다. 그런 다음 선생님은 이야기하셨다.

"일기와 생활문의 차이점을 알았으니까, 오늘 집에 가면 일기장 펴 놓고 좋은 글감이다 싶은 내용 하나 골라 생활문으로 써 보렴."

분명 숙제는 아니었다. 써 보라고만 하셨다. 그런데 집에 온 나는 꼭 써 보고 싶었다. 숙제라고 했으면 하지 않을 궁리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불평이 고개를 내밀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써진 내 일기가 하루치도 없다는 데 있었다. 일기장 한 권을 다 뒤졌지만 이야기가 될 만한 내용이 없었다. 그저 그런 내용으로 글씨만 큼직큼직하게 억지로 쓴 일기뿐이었다. 그나마 일기장은 두 권밖에 없었다. 모아 두지 않은 걸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고물 되느니 미리미리 폐품으로 내는 게 현명해'

하지만 일기를 생활문으로 꼭 고쳐 보고 싶었는데 그렇 수가 없어 우울했다.